절박하지만 슬퍼하지 않는 여자
이 영화는 곱씹을수록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영화다. 최근 세계적인 시상식에서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을 하면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영화 '서브스턴스'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아노라'에 각종 상을 양보한 서브스턴스는 필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대중의 반응도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배우 데미 무어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거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데미 무어도 대단했지만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아노라'의 주인공이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대중과 비평가들의 평가는 차지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서브스턴스가 오직 '분장상' 하나만 받은 현실까지가 전부 '서브스턴스' 자체라고 느껴졌다. 영화는 영화 속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에서도 사회의 조명은 나이 든 여자 배우를 비켜서 다음 세대의 젊은 배우를 비추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유일한 가치는 마치 '잘 꾸며낸 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넘겨준 분장상이 이 작품의 외침을 그저 꾸며낸 소음으로 평가절하했다. 아카데미 상이 영화계의 유일한 상도 아니고 배우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지만 결과의 구조적 의미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절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서브스턴스의 배우 데미 무어도, 감독 코랄리 파르쟈도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가 여성을 절박하게 만들더라도, 거기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무력하게 눈물만 흘리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분개하며 일어나 분노를 끌어모아 싸우기를 바란다. 엘리자베스와 수도 눈물을 떨굴지언정 펑펑 울거나 슬픔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니라는 외침을 포효하는 것처럼.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결말
엘리자베스는 젊음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단이라고 믿기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서브스턴스를 선택한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미지의 방법이지만 후기 하나 찾아보지도 않고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유해해 보이는 연두색 형광 물질을 직접 주입할 만큼 엘리자베스는 절박하다. 그런 행동은 본인의 몸을 그저 물질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는 그대로 아껴주고 인정해 주고 좋은 것만 먹이고 보듬어 줘야 할 자기 몸에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몸을 도구화하고 함부로 다룬 죄는 돌이킬 수 없이 절망적인 벌로 돌아온다. 엘리자베스가 자조한 현실적, 실존적 공포 자체인 벌을 온몸으로 받으며 영화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그 죄목은 단지 엘리자베스에게만 있을까?
서브스턴스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 영화였다. 흔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1층짜리 박스라고 상정했을 때, 상상 이상이라는 수준이 1층의 박스를 뚫고 5층까지 솟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결말은 상상 이상보다도 그 이상이었다. 층으로 계산하는 기준을 거부하듯 대기권을 뚫고 우주를 넘볼 만큼 파격적인 결말이었다. 그만큼 이 영화를 끝까지 보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심정과 무자비한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강한 비위가 필요한 영화다.
사회적 시선은 우리를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가?
나는 여전히 나라고 외치는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등장할 때 필자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극단까지 치닫는 영화 후반부 전개에 숨이 차고 정신이 증발해 버릴 정도였다. 마라 맛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전개였다. 휘몰아친 소동이 쓱싹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꼼짝도 못 했다. 쉽사리 자리를 뜰 수도 없고 명쾌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도 없었다.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단순히 시각적으로도 내용상으로도 충격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 장르였다면 특수분장과 특수 효과에 매우 공들였다는 평가와 함께 배우들의 열연에 감탄하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 이상의 '둔기적 충격'이 있다. 현실에서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처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충격과 고통과 공포를 수반했다. 그 이유가 뭘까? 영화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이러이러해야 해'라는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희망이나 교훈이나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샅샅이 파헤치고 낱낱이 보여준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이야기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이며, 주인공이 이렇게 된 원인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개인의 탓이 아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엄연히 사회와 환경이며 그들의 시선과 강요다. 영화는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래서 막이 내리고 관객은 생각할 게 많아진다. 판단과 생각, 그리고 앞으로의 행동은 오롯이 우리 사회의 몫이라고 말하는 듯한 스크린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해 보자면
희망도 없고 절규와 비명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시선과 가부장제에 맞서 삶의 균형을 찾고,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긍정하고 싶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시선과 고정관념을 단번에 부정하고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그게 고정관념이고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할 수도 있다. 그게 자연스럽고 편하다면 달라질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고, 달라질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면, 어딘가 옥죄는 느낌이 들고 벗어나고 싶다면 그 불쾌감을 인지하고 주목하길 바란다. 엘리자베스가 혐오스러운 이유, 수가 무사히 새해 전야 쇼에 오르길 바라는 이유, 결말에 충격과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를 생각해보길 바란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낯설게 바라보고 이질감을 인식하는 데서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그 단계에 오면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알아서 보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엘리자베스가 겉만 어른이지 속은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유년기의 발랄함을 졸렬하게 드러내는 듯한 노란 코트가 의식 위를 동동 떠다녔다. 자꾸만 물음표를 던지게 됐다. 엘리자베스는 왜 혼자일까? 그녀는 왜 자신을 고립시켰을까? 엘리자베스에게 다정한 가족이 있었다면, 당찬 친구가 있었다면 누가 봐도 위험하고 정상이 아닌 서브스턴스에 뛰어들도록 그녀를 내버려두었을까? 여기에 시사점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전념하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분야에서 갑작스럽게 실업했다.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고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은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작동할 네트워크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지혜와 여유가 없었다. 어린 날의 나도, 연륜을 겸비한 나도, 못난 나도, 잘난 나도 전부 나라는 한 사람이다. 쉽지 않겠지만 이런 모습의 나와 저런 모습의 나를 통합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먼저 나를 알아주고, 이런 나를 알아주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휘몰아치는 혼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연결되고 연대해야 한다. 나를 재단하고 비난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고, 나를 사랑하고 아끼며 지지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가 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된다.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영화를 보고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늙으면 추해질 것이라는 오해와 막연한 공포를 품었다면 놓아주길 바란다. 이 영화는 사회의 폭력을 똑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은 강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도 분명 필요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수용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늙고 나이 듦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주길 바란다. 나이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기준에 따라 늙었다고 할 수도 있고 어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늙는 것은 공포가 아니다. 늙는 것을 공포라고 생각하는 것이 공포다. 이 차이를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는 멋지게 나이 든 어른들이 참 많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롤모델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희망을 가지길 바란다. 우리가 하나 둘 늘어가는 주름 사이사이로 깊은 지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날까지 사람들과 연대하고 서로를 지지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길 바란다.